나는 의류 디자이너로 꽤 오랜 시간
회사생활을 해왔다.
고등학교 때부터 패션디자인과 진학을 염두에 두고
미술을 해서 패션디자인학과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자연스럽게 직업으로
디자이너를 선택했다.
대학생일 때 생각했던 디자이너는
대부분 패션쇼에 내 컬렉션을 발표하고
패션위크를 하는 그런 디자이너였지만,
졸업 후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내 여정은
그런 컬렉션을 하는 디자이너 선생님들과는
거리가 먼 여정이었다.
인턴으로 컬렉션은 하는 디자이너 밑에서
일한 적도 있지만 본가가 부산이라
내 생활비를 벌어 써야하는 서울살이를 하는 입장이라
디자이너 브랜드에서의 일은
생계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최근 화두가 됐던 열정 페이는
나 같은 패션, 디자인업계 종사자라면
새로울 것도 없는,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게다가 국내브랜드에 입사하려면
여성복은 막내 디자이너가 피팅을 해야 했고
남성복은 여자라서 진입 문이 좁았다.

원하진 않았던 생산업체에서
몇년동안 경력을 쌓고 나서,
다행히 운이 좋게 내가 평소 좋아했던
캐주얼브랜드가 있는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하지만 입사만큼 행복한 나날이 펼쳐지진 않았다.
브랜드 경력이 없다보니 실장에게 무시당하는 건
당연히 감내해야 할 일중 하나였고,
일이 힘들다보니 함께 일할 동료들은
하나 둘 도망치듯 그만두어
일 폭탄은 번번히 내 몫이었다.
그 덕에 일을 빨리 배우는 장점도 경험하게 되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 20대의 디자이너로서의 시간은 척박하고 고단했던 기억으로만 가득하다.

30대에 들어서야 아주 조금 편한
회사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는 남들보다 아주 조금 더 창의적인 일을 하는
회사원의 삶을 충실히 살아왔다.
경력이 쌓이니 20대 때보다
내 생각에 당당하긴 해졌지만
야근이 없없던건 아니었다.
내가 경험했던 디자이너로서의 삶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화려하거나 우아하지 않다.
업무에 대한 평가는
실력으로 평가받지 않을 때가 다반사고,
정치와 아첨이 넘쳐나는 전쟁터 같은 곳이 많았다.
감투 욕구가 부족했던 나는 자연스럽게 뒤쳐졌고,
내 일만 열심히 한다고 회사에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 씁쓸한 현실에 좌절하곤 했다.
그렇다고 나쁜점만 있었던 건 아니다.
디자이너로서의 일이 내 적성과 잘 맞기도 했고
내가 디자인한 옷이 잘 팔릴 땐 성취감도 느낄 수 있었다.
특히나 내가 만든 옷들은 소비자들보다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좋아해주는 일이 많았다.
디자이너들을 대부분
자기가 속해 있는 브랜드의 옷을 입는 경우도
간혹 있겠지만 보통은 그러지 않는다.
왜냐하면 눈만 뜨면 보는게 옷이다 보니
취향이 까다롭고 회사옷을 입고 다니는 게
그다지 세련되보이지 않기 때문이랄까?!
그래서 내겐 주변 디자이너들이
내가 디자인한 아이템을
개인 오더(직원들은 생산가로 개인적으로 오더해서 저렴하게 살 수 있다) 하는 일은
또 한편으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시즌마다 해외출장으로
일반 회사원들보다 해외경험도 많이 쌓을 수 있고
그 덕에 마일리지도 많이 쌓을 수 있다.
일본, 홍콩 같은 아시아 나라들 뿐만 아니라
유럽으로 출장 가기도 한다.
아무래도 유럽은 비용이 많이 드는 출장이라
모든 사람이 갈 수 없기 때문에 기회만 주어진다면
출장이 힘들더라고 많은 경험이 된다.
나는 운이 좋게도 또래친구들에 비해
유럽 출장의 기회가 많은 편이었다.
그리고 남자보다 여자 비율이 많은 직장에 다니다 보니
회사에서 많은 여성들이 당한다는 남녀차별이나
성희롱 같은 문제들은 적은 편인것 같다.
(이건 내 개인적인 경험일 뿐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디자이너로서의 장점을 열심히 찾아보아도
결국 회사에 속한 회사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나이 들어서도 안정적으로 회사생활을 할 수 있는
직종도 아니라서
디자이너들은 오늘도 앞으로 먹고살 걱정으로
카페를 여는 게 꿈이거나
취집(시집으로 취직하는)으로 갈 수밖에 없는
운명체인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걱정하고 있다.
앞으로 뭐해먹고 살지?!
그리고 누군가 디자이너
특히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해주고 싶은 말은
재능이 엄청나거나 집이 부자이거나
40살까지 일하고 관둘게 아니라면
다른 일을 준비하라고 말해 주고 싶다.
너무 비관적이었나? 그래도 할 수 없다.
현실은 더 혹독하니까...
나도 언제까지 이 일로 밥벌이가 가능할지 모르는
불투명한 미래의 실을 부여잡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회사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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